교육을 투자가 아닌 고급 소비라고 판단해야만 교육비의 왜곡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여진다. 누군가는 투자로 보아서 아끼지 말라고 한다. 투자로 보기 때문에 더 교육비를 안정시킬 방법이 강구되어야 한다.
자산의 임대료가 이를 이용해 벌어들인 수입보다 크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 물어보는 것이다.
1,000만원의 교육비를 내고 교육을 받았지만, 1,000만원을 못벌어들인다면 어쩔 것인가 묻는 것이다.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기회비용을 따진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그렇게 다가가고 있다.
교육이 투자가 아닌 고급 소비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비단 교육만이 그러겠는가 하지만, 여기서는 교육만 놓고 이야기해야 이해가 쉽다.
교육은 권력을 잡기 위한 도구가 되어버렸고, 자랑하기에 어울리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나아가 편중된 양극화는 교육비도 서민들의 수입에 비해 엄청나게 올라도 총 국민소득을 내세우며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우린 교육비를 서민들의 수입에 비해서 높은지 낮은지를 묻는 것이다. 소득이 2배 3배인 국가의 교육비를 비교해서 낮다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연에서 입은 상처보다도 사람에게서 입은 상처가 더 깊고 아프다
우린 살면서 남에게 깊은 사랑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그만큼 큰 상처를 안겨주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나이가 들어 골병이 든 것도 이 모든 마음의 상처였다.
자라면서 우리의 지각은 바람직하지 않는 충격으로부터 수없이 자극받아왔고 상처를 입어왔다.
차별로부터 받은 아픔은 나이가 들어 왠만한 차별은 차별로도 보지 않을 정도로 무뎌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각인되고 훈련되고 또 상처를 받다가 나이가들면 골병이 되어
이제 남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나 중요한건, 인류가 감기 바이러스와 공존해왔던 것처럼 차별, 부당함은 우리와 공존해왔다는 것이다.
모순의 공존을 이해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