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생계비 폐기와 관련해 중위소득이이란 용어가 자꾸 나온다.
그런데, 이 중위 소득이란게 평균 소득과는 다르다. 우리가 말하는 1인당 국민소득은 평균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래전에 일본인 수학자가 써놓은 글에는 이미 평균소득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산술평균보다도 기하평균값이 더 잘 반영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런 논리로, 개인의 소득은 상대방 소득과 서로 연관되어 있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이 돈을 벌면 배가 아프지만, 그사람이 자신의 물건을 사줄 사람이라면 돈을 버는 것이 이득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소득의 지난친 양극화는 평균소득을 더 낮게 할 수 있다. 따라서 기하평균은 이렇게 양극화가 심할때, 더 유용할 수 있다. 다만 계산이 어렵다는 게 단점이다.
그러나 중위 소득은 또 어떤가? 1위 부터 쭉 일직선으로 줄을 세워 중간자의 소득을 말한다고 한다.
누구는 벌써부터, 절대빈곤이 없다는 소리를 하고 있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특정 사회에서 사람구실하며 살아가는 돈을 필요소비 총액으로 계산하면, 절대빈곤은 실제 줄지 않았다. 옛날 사회에는 학교가 절대로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다 학교를 다니니 엄청난 절대빈곤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사회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지금은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가 힘들다. 학비는 불가피한 면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 소비액 즉 최저생계비는 사회에 따라 그 액수가 달라지는 것일 뿐이다.
어쨌든 중위소득 개념으로 복지를 한다고 하는데, 지금 정책 논란을 양분화시키면, 한편의 논리는 거둘때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걷고, 지원할때는 선별적으로 한다는 것인데, 이러면 과연 제대로 소득재분배가 되겠는가?
또다른편은 거둘때, 선별적으로 걷고 누구에게나 지원하자는 것 같은데, 이것도 옳은건가?
우리가 알고 있는 피보나치 수열은 1부터 시작해서 앞 수와 뒷수가 황금비에 가까운 정수들의 모임이며 이 수는 앞 두수를 더해 뒷수가 되는 수이다고 정의해야 한다.
즉 앞 두수를 더해가는 수열은 세상에 무수히 많기 때문에 그렇다.
낮부터 내린 비는
이 저녁 유리창에
이슬만 뿌려놓고서
밤이 되면 더욱 커지는
시계소리처럼 내 마음을
흔들고 있네
이 밤 빗줄기는
언제나 숨겨놓은
내 맘에 비를 내리네
떠오는 아주 많은 시간들속을
헤매이던 내 맘은 비에 젖는데
이젠 젖은 우산을
펼수는 없는 것
낮부터 내린 비는
이 저녁 유리창에
슬픔만 뿌리고 있네
이 밤 마음속엔 언제나
남아있던 기억은
빗줄기처럼
떠오는 기억 스민순간 사이로
내마음은 어두운 비를 뿌려요
이젠 젖은 우산을
펼수는 없는것
낮부터 내린 비는
이 저녁 유리창에
이슬만 뿌려 놓고서
밤이 되면 유리창에
내 슬픈 기억들을
이슬로 흩어 놓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