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정도 이같은 글을 써본적 있다.
지식인들은 지식의 경제발전의 기여도를 매우 높게 평가한다. 그래서, 친자식에게는 아니지만, 공식적으로는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기보다 지식을 물려주라고 하기 일쑤다.
그런데 친자식에게는 지식도 지식이지만, 재산을 물려주는 경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자본의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가 되고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뜻을 이해하기가 어려우면, 지난해, 화제를 불렀던 책 21세기 자본론의 핵심주제를 생각해보라.
자본의 파생가치가, 노동 가치보다 높을때, 지식보다는 자본을 물려줘야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 논리 아닌가?
그런데도, 순수한 학자들은 자본의 가치를 더욱 높게 하는 것에 동조하면서, 두루 진실 교육이라고 지직으로 상속하라고 한다. 그건 진실이 아니다.
문제는 그렇게 모두가 그렇게 한다면, 지식에 의한, 사회의 진보는 기대하기 어려운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다시한번 써보지만, '피보나치 수열은 황금비'라고 한다면, 정수간의 비가 무리수가 될 수 있다, 또는 무리수는 정수의 비로 표현할 수 있다가 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황금비는 무리수비이기 때문이다.
사랑함에 세심했던 나의 마음이
그렇게도 그대에겐 구속이었소
믿지 못해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헤어지는 이유가 됐소
내게 무슨 마음에 병이 있는 것처럼
느낄 만큼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그대 왜려 나를 점점 믿지 못하고
왠지 나를 그런 쪽에 가깝게 했소
나의 잘못이라면 그대를 위한
내 마음의 전부를 준 것뿐인데
죄인처럼 그대 곁에 가지 못하고
남이 아닌 남이 되어 버린 지금에
기다릴 수 밖에 없는 나의 마음은
퇴색하기 싫어하는 희나리 같소
내게 무슨 마음에 병이 있는 것처럼
느낄 만큼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그대 왜려 나를 점점 믿지 못하고
왠지 나를 그런 쪽에 가깝게 했소
나의 잘못이라면 그대를 위한
내 마음의 전부를 준 것뿐인데
죄인처럼 그대 곁에 가지 못하고
남이 아닌 남이 되어 버린 지금에
기다릴 수 밖에 없는 나의 마음은
퇴색하기 싫어하는 희나리 같소
퇴색하기 싫어하는 희나리 같소